이 글은 윤봉길 의사의 생애, 자필 기록, 유서와 유품을 바탕으로 한 1인칭 문학적 재구성입니다.
본문의 독백은 실제 윤봉길 의사의 발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며, 실제 기록을 인용하는 부분은 별도로 구분합니다.
나는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배움을 이어갔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야학을 열었다.
『농민독본』을 쓰고
부흥원과 월진회를 만들었다.
1932년 4월 29일 이전에도
그때 나는 스물네 번째 해를 살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마지막 하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고, 이듬해 학교를 떠났다. 이후 한학을 공부하고 신문과 잡지를 읽으며 공부를 이어갔다.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 무렵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다.
1926년에는 친구들과 야학을 열었다.
1927년에는 그 야학에서 사용할 『농민독본』을 직접 썼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웠고, 1929년에는 월진회를 조직했다.
내가 남긴 기록에는 시가 있고, 일기가 있고, 농촌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 있다.
그리고 훗날 상하이에서 직접 적은 이력서와 유서도 남아 있다.
한 사람의 삶을 마지막 사건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내게도 그날 이전의 시간이 있었다.
배우던 시간.
가르치던 시간.
글을 쓰던 시간.
사람들과 함께 마을의 일을 의논하던 시간.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지나
1932년 4월 29일에 도착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스물네 해였다.
그 시간은 먼저, 삶이었다.
1919년, 열한 살 무렵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나는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며
덕산공립보통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학교를 떠났다고
배움까지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1918년, 나는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내 생애의 기록에는 그해의 선택이 남아 있다.
3·1독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나는 열한 살이었다.
학교를 나온 뒤에는 『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했고, 동시에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에는 오치서숙에 들어가 성주록에게 배웠다.
학교라는 건물을 떠났지만 공부는 계속됐다.
한문을 읽었고,
시를 썼고,
책과 신문을 읽었다.
1923년에는 오치서숙의 중추절 시회에서 장원을 했고 여러 시문을 남겼다.
1919년에 끝난 것은 배움이 아니었다.
내가 배우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었다.
나는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 무렵부터
아이들을 가르쳤다.
1926년에는 야학을 열었고,
1927년에는 『농민독본』을 썼다.
1928년 부흥원,
1929년 월진회.
배움은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오치서숙을 졸업하기 전부터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훗날 상하이에서 직접 작성한 이력서에는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까지 약 2년 동안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아동들을 가르쳤다고 적었다.
1926년에는 친구들과 야학을 열었다.
농촌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해지는 일화 가운데에는 아버지의 묘를 찾으려던 한 청년이 묘표의 글자를 읽지 못해 여러 묘표를 뽑아 들고 나를 찾아온 이야기도 있다.
한 사람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1927년, 야학에서 사용할 책을 직접 만들었다.
『농민독본』.
그 책에는 단순히 글자를 익히는 내용만 담지 않았다.
농민의 자존, 평등과 자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도 담았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웠다.
독서회를 만들고 월례강연회를 열었으며, 체육회와 구매조합을 조직했다.
1929년에는 월진회를 만들었다.
가르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농촌의 생활과 경제, 공동체까지 함께 바꾸려 한 활동이었다.
나는 책을 썼고,
사람들을 모았고,
배운 것을 나누었다.
그것이 당시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1929년, 나는 『기사년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일상의 생활과
농촌계몽 활동뿐 아니라
광주학생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기록도 남았다.
같은 시기, 내가 걸어온 농촌계몽운동의 방향에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1929년, 나는 『기사년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일기에는 하루의 생활과 농촌에서 이어가던 계몽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것만 있지 않았다.
그해 일어난 광주학생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그보다 앞선 1928년에는 시조사 기자 이흑룡을 만나 국내외에서 이어지고 있던 의열투쟁과 무장독립운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해오던 일은 계속됐다.
야학을 운영했고,
학예회를 열었고,
월진회와 위친계를 조직했다.
동시에 일제의 감시도 이어졌다.
내가 남긴 일기와 이후의 행적을 나란히 놓으면
1929년은 하나의 경계처럼 남는다.
농촌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마을을 일으키던 시간과,
국외에서 다른 방법의 독립운동을 찾게 되는 시간 사이.
그 경계에 『기사년일기』가 남아 있다.
1930년 3월 6일.
나는 고향 예산을 떠났다.
떠나기 전 한 문장을 남겼다.
丈夫出家生不還
뜻을 품고 집을 나서니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1930년 3월 6일.
나는 충남 예산의 고향을 떠났다.
그날 남긴 친필 유묵이 지금까지 전한다.
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떠나니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삽교를 지나 서울로 향했고,
선천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내가 떠난 집에는 부모와 아내, 그리고 큰아들이 있었다.
둘째 아들 담은 내가 고향을 떠난 뒤 태어났다.
그날의 마음을 우리가 새로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떠난 날짜가 남아 있고,
떠나기 전에 쓴 일곱 글자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행적의 무대는 조선 밖으로 옮겨갔다.
1930년 3월 6일.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시량리의 청년과
국외 독립운동을 향해 가는 나 사이에 남은 날짜다.
중국에 도착한 뒤에도
생활은 계속되어야 했다.
나는 칭다오에 머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돈을 벌었고,
일부는 고향으로 보냈다.
망명 뒤의 시간 역시
하루하루의 생활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해서 곧바로 상하이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을 이어간 끝에 1930년 4월 30일 칭다오에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 머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했다.
옷을 세탁하고 돈을 벌었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 가운데 일부는 고향으로 보냈다.
상하이로 갈 여비도 마련해야 했다.
고향에서는 농촌계몽운동을 했지만
국외로 나온 뒤에는 생계를 위한 노동도 해야 했다.
독립운동의 길을 찾는 일과
그날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일하는 일은
서로 다른 시간이 아니었다.
같은 하루 안에 있었다.
나는 칭다오에서 시간을 보내며
다음 길을 준비했다.
목적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던 상하이였다.
1931년, 나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공장에서 일했고,
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직공들과 친목회를 만들고
야학과 노동운동도 이어갔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1931년 5월 8일.
나는 칭다오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뒤 이유필과 안공근을 만나 거취를 의논했고, 박진이 운영하던 모자 공장 미리공사에 직공으로 들어갔다.
나는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직공들과 함께 한인공우회라는 친목 조직을 만들었다.
그곳에서도 야학과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상하이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했다.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김구 선생님을 찾아갔다.
1932년 4월 1일,
나는 김구 선생님을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뜻을 전했다.
고향에서 시작했던 사람을 가르치고 모으는 활동은
상하이에서도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서 있던 곳은 예산의 농촌이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동하던 국제도시 상하이였다.
1932년 4월 26일.
나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었다.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직접 썼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다음 날에는 훙커우공원을 답사하고
내 이력서와 유촉시를 김구 선생님에게 전했다.
이제 기록에는 날짜가 정확히 남기 시작한다.
1932년 4월.
상하이의 상황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4월 20일, 일본 측이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29일 훙커우공원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생님과 나는 의거를 준비했다.
4월 26일.
나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었다.
태극기 앞에 섰고,
내가 직접 작성한 선서문을 목에 걸었다.
그 문서에서 나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고 서약했다.
기념사진도 남겼다.
4월 27일에는 다시 사진을 촬영했고,
훙커우공원을 답사했다.
숙소로 돌아와 내 생애를 적은 자필 이력서와 유촉시를 작성해 선생님에게 전했다.
그 이력서와 유서, 거사를 앞두고 쓴 글들은
지금도 유품으로 남아 있다.
이전의 기록에는 연도가 중심이었다.
이제 기록은 날짜까지 좁혀진다.
1932.04.26.
1932.04.27.
그리고 1932.04.29.
내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종과
고향을 떠난 뒤 태어난 둘째 담.
1932년, 나는 두 아이에게 글을 남겼다.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적었다.
내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종.
그리고 내가 고향을 떠난 뒤 태어난 둘째 아들 담.
1932년 훙커우공원 의거를 앞두고 작성한 유품 공책에는
두 아이에게 남긴 글도 들어 있다.
제목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나는 어린 두 아들에게
조선을 위해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아비 없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라.”
내가 어떤 갈등을 했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아이들과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말을
새로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직접 두 아들에게 쓴 글이다.
거사를 앞둔 젊은 아버지가
두 어린 아들에게 남긴 기록.
그 문서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4월 29일 아침.
나는 선생님과 마지막 식사를 했다.
내가 새로 산 시계는 6원,
선생님의 시계는 2원이었다.
나는 서로 바꾸자고 말했다.
그리고 이유를 덧붙였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 쓸 데가 없으니까요.”
1932년 4월 29일 아침.
나는 김구 선생님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다.
공원으로 떠나기 전
우리에게는 두 개의 회중시계가 있었다.
내 시계는 전날 새로 구입한 것이었다.
6원.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시계는
2원짜리였다.
나는 두 시계를 서로 바꾸자고 했다.
그리고 이유를 말했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 쓸 데가 없으니까요.”
6원짜리 시계.
2원짜리 시계.
그리고 남은 한 시간.
그 세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날 아침의 기록은 남는다.
나는 선생님의 시계를 받아 들고
훙커우공원으로 향했다.
두 개의 시계는 이후
각자의 유품으로 남았다.
오전 7시.
나는 훙커우공원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오전 11시 40분경.
일본군 주요 인사들이 자리한 단상을 향해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32년 4월 29일의 기록이다.
1932년 4월 29일.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7시 무렵 훙커우공원으로 출발했다.
그곳에서는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일본군과 일본인 거류민, 각국의 사절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11시 40분경.
일본군 주요 인사들이 자리한 단상을 향해
준비해 간 수통 형태의 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폭발했다.
일본군과 주요 인사들이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다.
나는 현장에서 붙잡혀
상하이파견군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여기에 내가 두려웠는지,
두렵지 않았는지에 대한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선택과 행동이다.
4월 26일의 선서.
공원 답사.
4월 29일 오전 7시의 출발.
그리고
11시 40분.
그 시간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5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아침.
사형집행을 알리며 유언을 묻자
나는 답했다.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
4월 29일 의거 직후
나는 체포되었다.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2월 18일에는 다시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12월 19일 아침.
사형 집행 장소로 이동했다.
집행에 앞서 유언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때 내가 한 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
소지품 처리에 관한 질문에도
필요 없다고 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측의 사형집행 기록은
당시 나의 태도를 강담침착이라고 적었다.
오전 7시 27분,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7시 40분, 사망이 확인되었다.
1908년 6월 21일에 시작한 생애가
1932년 12월 19일에 끝났다.
만 스물네 살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마음을
우리가 대신 말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질문과 마지막 대답이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은 1932년 12월 19일 끝났다.
그러나 그 뒤에도 기록은 이어진다.
훙커우공원 의거 이후
중국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 확대됐다.
그리고 광복 뒤인 1946년,
내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1932년 12월 19일 이후의 일은
더 이상 내가 직접 기록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여기부터는
남겨진 역사 기록을 따라간다.
훙커우공원 의거는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대되었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협조로 이어졌다.
침체되어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도
다시 활기가 생겼다.
동시에 일제의 추적도 더욱 거세졌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이동해야 했다.
역사는 언제나 하나의 결과만 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1932년 4월 29일 이후
한국 독립운동과 중국 사회의 관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렀다.
1945년 광복.
1946년에는 일본에 묻혀 있던 내 유해가 발굴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봉창·백정기 의사와 함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30년 예산의 집을 떠날 때
내가 남긴 글이 있었다.
丈夫出家生不還
나는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기록은 16년 뒤,
그 귀환까지 이어져 있다.
나는 광복을 보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내 삶이 끝난 뒤 조국에는
다른 시간이 찾아왔다.
1946년, 나는 유해로 고국에 돌아왔다.
내가 보지 못한 시간은
남은 사람들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1932년 12월 19일 순국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을 보지 못했다.
광복을 보지 못했고,
그 뒤 새로운 나라의 시간을 살아보지도 못했다.
내가 남긴 두 아들이 성장하는 시간도
내 생애 밖에서 흘렀다.
그러나 기록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1946년, 일본에 묻혀 있던 내 유해가 발굴됐다.
그리고 고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내 생애는 스물네 해였다.
그 뒤에 이어진 시간은
더 이상 내가 기록한 시간이 아니다.
남아 있던 가족들의 시간이고,
독립운동을 이어간 사람들의 시간이며,
광복 이후를 살아간 사람들의 시간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내가 보지 못한 미래의 마음을 대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사실만 남겨둔다.
나는 광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은 왔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남은 사람들이 살아갔다.
